여행

전주이야기 <2> - 전동성당과 천주교

알 수 없는 사용자 2005. 9. 12.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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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강에게

날이 많이 추워졌구나.
며칠 전 네가 취직 시험을 보았다는 것을 기억하곤 편지를 띄워야겠다는 생각을 했단다. 그런데 정작 컴퓨터 앞에 앉아도 그리 쉽게 써지질 않더구나. 하지만 늦게라도 보내는 것이 나을 것 같아 몇 자 적어 본다.

앞으로도 2,3차 시험이 남은 너에게 무거운 얘기보다 어쩌면 네가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을 전동 성당에 대해 얘기를 하려고 해.

너도알다시피 명목상으론 아직 나의 신앙은 천주교란다.
그런데 어쩌다보니 성당에 가는 발걸음이 귀찮아지고 점점 가는 횟수가 줄더니 이젠 1년에 한 번 가면 다행일까?

그런 내가 고색창연한 경기전 앞에 우뚝 서 있는 전동 성당을 보고 그냥 지나친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겠지. 그런데 이상하게 경기전과 전동 성당은 기가 막히게 잘 어울리고 있더구나.

이렇게 동서양의 건물이 나란히 서 있기는 덕수궁도 마찬가지지만 아무래도 그곳의 느낌은 '어색함' 이었던 데 비해 이곳의 느낌은 형제 같다는 것이었어.

전동성당의 건물이 100여년을 넘어서 경기전과 같이 늙어가는 처지(?)여서 일까?

전동 성당은 원래 전라감영이 있던 자리에 세워졌는데 천주교 신자의 순교지이기도 한 이 곳에 1889년 프랑스의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보드네(한자명 尹沙物) 신부가 성당 부지를 매입하고, 1908년 V.L.프와넬(한자명 朴道行) 신부의 설계로 건물이 완공되었다고 하지. 호남지방의 서양식 근대건축물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오래된 것의 하나로, 평지의 성당으로는 대구 계산동 성당과 쌍벽을 이룬다고 해.

계산동 성당은 몇 해 전에 가보았는데 전라도에 전동 성당이 있다면 경상도에는 계산동 성당이 있다고나 할까?
그런데 계산동에서는 어느 신부가 뻐기듯이 그랜져 승용차를 몰고 돌아다니는 바람에 기분이 잡쳤지만 말이야.

수강아, 전동 성당에 대한 기록을 찾아보다가 난 영 기분이 상해버리고 말았단다. 어쩌면 내 성격적 결함 때문인지도 모르겠지만 어느 한 쪽의 일방적인 이야기만 남아 있는 것 같아서 말이지.

전동 성당을 설계한 프와넬 신부는 서울의 명동 성당을 건축한 사람이지. 보드네 신부가 전동 성당에 얼마나 큰 애정을 갖고 있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해. 중국인 인부 100여명을 데려오고 익산 황등의 돌을 가져와 지었으니 당시로서는 큰 공사였음을 상상하기에 충분하지. 전라도 각지에서 교인들이 자진해서 노력봉사를 나와 공사를 도왔다고 하는구나. 그러니 전동 성당에 대한 얘기는 당시 전라도에 유명짜 했을 거야.

그런데 때마침 전주부의 도시 계획에 따라 풍남문을 제외한 전주의 3개 성문과 성벽이 헐리게 되자 보드네 신부는 당국과 교섭을 벌인 결과 철거되는 성벽의 돌과 흙을 성당 건축재로 써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단다. 그래서 일찍이 참수형을 당한 순교자 유항검의 머리가 효수되었던 풍남문 성벽의 돌과 흙이 성당의 주춧돌로 쓰이게 되었지. 천주교 측에서 보자면 순교자의 피가 흐른 땅 위에 순교정신이 담긴 건축재로 성전을 세우는 쾌거를 이룬 것이었겠지.

하지만 아버지의 신주마저 태워버린 사람들의 종교가 전라감영 자리에 그것도 전라도인들이 현판에 '호남제일성'이라고 써 붙여 놓을 정도로 자랑스럽게 여기던 성벽을 허문 그 돌로 성당을 지었으니 그것을 바라보던 사람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1908년이면 이미 일본의 영향력이 절대적이었을 것이고 그렇다면 더더욱 서양의 종교가 내 집안 안마당에 우뚝 솟은 첨탑으로 지은 건물이 보기 좋았을까?

전동성당이 로마네스크 양식의 아름다운 성당이라고 하지만 (사실 전동 성당의 건축 양식을 딱 잘라 무엇이라 말하기 힘든 것 같아. 로마네스크 양식과 비잔틴 양식 그리고 바실리카 양식이 혼합되었다고 볼 수 있겠지. 다만 고딕 양식이 아닌 것은 확실해) 아름다우면 아름다울수록 조선 민중의 가슴에는 절망감이 더 쌓였을 것 같아.

그리고 조선 왕조의 성지라고 할 수 있는 경기전을 내려다보는 위치에 세워져 있으니 더더욱 그랬겠지.

이런 이야기는 천주교의 기록에는 어디에도 없어. 솔직하지 못했던 게지. 물론 관점이 다르니 그랬을 수도 있지만... 천주교가 좀 더 일찍 솔직히 자신의 미흡함을 털어놓고 용서를 구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과 함께 지금이라도 전동 성당 구석진 곳에라도 전동 성당의 돌들은 전주 성벽을 헐어낸 것을 썼으며 그것은 당시 민중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것이었노라고 써두면 좋을 것이란 생각을 해.

그래도 세월은 이 둘을 잘 조화시켜 놓았어. 마치 천주교가 이젠 우리네 생활에 깊숙이 자리잡은 것처럼 말이지.

얼마 전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는 지난 과거를 사과했다지. 그러한 모습이 '공존'이 아닐까 싶어. 그래서 더더욱 전동 성당과 경기전이 친숙해 보였나 봐.

전동 성당은 1981년 사적 288호로 지정되어 국가에서 보호하고 있어. 100여년 전에 밉살스럽게 보여졌을 건물도 우리가 아끼고 보존해야하는 우리 것으로 육화된 것이지.

아참, 장난스럽게 느낄지 모르지만 비잔틴 풍이라고 말하는 전동 성당의 첨형 돔은 내가 보기엔 남성의 성기를 상징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닮아 있는 것 같아. 내가 잘 못 본 것일까?

수강아, 시험이다 뭐다 마음이 바쁘고 힘들 때 전동 성당에 와서 마음을 달래진 못해도 내가 보낸 사진들을 보며 위로하렴. 대기(大器)는 만성(晩成)이라 하였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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