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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데요시는 왜 가톨릭을 탄압했나?

MagicCafe 2019. 2. 6.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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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데요시는 왜 가톨릭을 탄압했나?

2월 6일 성 바오로 미키와 동료 순교자 기념일


'나는 아무런 죄도 범하지 않았지만, 단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전파했다는 이유로 죽는 것입니다.
나는 이러한 이유로 죽게 됨을 기쁘게 생각하며, 우리 주님께서 나에게 내려 주신 커다란 은총이라고 생각합니다.'
- 성 바오로 미키 순교자의 십자가 위 설교 중

불교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가톨릭을 이용하고 싶었던 오다 노부나가는 가톨릭에 대해 우호적인 태도를 취했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처음에는 노부나가처럼 가톨릭에 우호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바테렌 추방령이라는 가톨릭 추방령을 내리게 됩니다.

당시 예수회 일본 책임자였던 가스파르 코엘료와 규슈 평정과 조선 침공등을 논의하던 과정에서 가톨릭이 나중에는 자신에게 위협이 될 세력이라는 판단을 하고 추방하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실제로 가스파르 코엘료는 바테렌 추방령이 발효되고 나가사키 등 예수회 영지가 몰수당하자 키리시탄 다이묘들을 규합하여 무력으로 히데요시에 대항할 것을 지시했고 자기 자신도 그 준비를 하기 시작했으며, 동시에 몰수당한 나가사키, 모기, 우라카미 영지를 되찾기 위해 군수물자를 확보하고자 했습니다. 또한 마닐라, 마카오, 고아에 연락해서 군대를 시급히 파견해 줄것을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회 동아시아 책임자였던 발리냐노는 자신의 힘을 과시하는 듯 보이던 코엘류의 태도에 불쾌한 감정을 품었던 히데요시를 달래기 위해서 황금장식을 붙인 매우 아름답고 훌륭한 밀라노산 백색 갑주 2벌, 모두 은으로 된 매우 훌륭한 장식이 붙은 커다란 검 두 자루, 진귀한 두자루의 총포 등 각종 선물을 주었고 히데요시의 조선 출병(임진왜란)에 전면 협력을 약속하였습니다. 실제로 조선에 출병한 다이묘들은 대부분이 고니시 유키나가를 비롯한 가톨릭 다이묘들이었습니다. 나가서 죽어도 좋고 조선을 정벌해도 좋으니까요.

그래서 한동안 추방령이 잠잠했었는데 산필리페호 사건이 일어나면서 추방령이 실제로 집행되었습니다.

산펠리페호 사건은 1596년 스페인 선박 산펠리페호가 표착하였고, 선원 중 하나가 가톨릭이 스페인의 세계정복을 위한 선봉 역할을 한다고 떠벌려 히데요시의 심기를 건드린 사건입니다. 이때 프란치스코회 선교사 등이 허가 없이 선교활동을 펼치고 있다는 사실을 히데요시가 알게 되었습니다. 히데요시(秀吉)는 즉각 본때를 보이기 위해서 프란치스코회 선교사, 일본인 예수회원과 신자 등 24명을 쿄토(京都)와 오사카에서 체포하였습니다. 일본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을 근거로 처형을 집행한 첫 사례입니다. 처형은 가톨릭 도시인 나가사키에서 집행하게 되었고 24명은 약3개월에 걸쳐 약 1,000km가 되는 길을 걸었습니다. 가는 길에 두 사람이 스스로 원해서 순교에 동참하였습니다. 이 26명은 1597년 2월5일에 처형되었는데 가장 어린이는 12세였습니다. 이들은 모두 1862년 교황 비오 9세에 의해 시성되었습니다.

최초로 일본의 통일을 이끈 히데요시의 생각에 가톨릭은 ‘통제되지 않는 위험한 외부의 힘’이었을 것입니다. 자신의 국가 내에 통제되지 않는 힘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제거되어야 한다는 것이 일본의 가톨릭 탄압에 깔려 있는 가장 중요한 논리일 것입니다.

그후 시마바라의 난이 가혹한 세금징수와 가톨릭 탄압으로 키리시탄이 주축이되어 일어나고 진압된 이후 가톨릭 정책은 한층 더 가혹하고 엄격한 것으로 바뀌었고, 쇄국정책을 추진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모든 성인에게 힘을 주시는 하느님,
복된 바오로 미키와 그의 동료 순교자들에게
십자가를 통하여 생명에 이르는 길을 열어 주셨으니
그들의 전구로
저희도 죽기까지 신앙을 증언하게 하소서.’
- 2월6일 바오로 미키와 동료 순교자 기념일 본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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