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트 밴쿠버는 노숙자 문제로 거칠다는 인상이 강한 동네지만, 낮은 임대료 덕분에 개성 강한 가게들이 하나둘 모여드는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1994년부터 단 한 번도 자리를 옮기지 않은 양조장이 묵묵히 버티고 있다. 310 Commercial Drive에 위치한 스톰 브루잉이다.
James Walton, 밴쿠버 크래프트 맥주의 선구자
스톰 브루잉의 창업자이자 헤드 브루어인 James Walton은 UBC에서 식물학과 생화학을 공부했다. 재학 시절부터 직접 맥주를 빚어 친구들과 나눠 마시던 그는, 졸업 무렵 확신을 얻었다. "내가 아는 지식을 여기에 써먹어야겠다"고. 1994년, 그는 뉴웨스트민스터 고물상을 직접 돌아다니며 낡은 탱크와 장비를 모아 양조장을 차렸다. 매쉬 턴은 폐요거트 제조기를 개조해 만들었을 정도다. 그렇게 탄생한 스톰 브루잉은 지금까지도 밴쿠버에서 가장 오래된 독립 크래프트 양조장 자리를 지키고 있다.
12년을 기다린 람빅
James는 단순히 오래 살아남은 양조인이 아니다. 1997년, 북미에서 가장 먼저 람빅(Lambic) 사워 맥주를 시도한 브루어 중 한 명이다. 문제는 당시 시장이 그 맛을 받아들일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 결국 12년을 그대로 묵혀두다가, 사워 맥주 붐이 일기 시작한 2009년이 되어서야 세상에 내놓을 수 있었다. 때를 놓쳐 창고에서 잠자던 그 람빅은 오히려 희귀한 물건이 되어 큰 주목을 받았고, 2010년 North West Brewing News 베스트 사워 독자 선정상까지 받았다. 시대를 앞서간 사람의 전형적인 이야기다.
양조장인지 실험실인지
처음 스톰 브루잉에 발을 들이면 세련된 크래프트 바와는 전혀 다른 공간감에 잠깐 당황하게 된다. 입구부터 일반 문이 아닌 로딩 도어고, 들어서자마자 실제로 돌아가고 있는 양조 현장 한복판이다. 투어도, 가이드도, 번듯한 테이스팅 룸도 없다. 폼보다 맥주로 승부하는 곳이다.
모든 맥주는 소량 배치로 생산하며, 무필터, 비살균, 무첨가를 고집한다. 4종의 고정 맥주를 기반으로 매주 새로운 브레인스톰(Brainstorm) 맥주들이 등장하는데, 지금까지 선보인 종류만 400가지가 넘는다. 파인애플 필스너, 바질 IPA, 애플파이 에일, 바닐라 위스키 스타우트 같은 조합이 끊임없이 나온다. 대부분은 놀랍도록 맛있고, 가끔은 만들고 나서 두 번 다시는 안 만들겠다고 판단하는 실험작도 있다. 하지만 그 시도 자체가 이 양조장의 정체성이다.
스태프와 커뮤니티
2013년부터 스톰 브루잉을 함께 이끌어온 매니저 Heather는 "이스트 밴 특유의 투박하고 꾸밈없는 분위기가 이곳의 진짜 매력"이라고 말한다. 반려견 동반 입장이 가능하고, Dogs of Storm이라는 별도 인스타그램 계정을 운영할 만큼 커뮤니티 분위기가 독특하다. 처음 온 손님들이 맥주 한 잔 나누며 친구가 되고, 다음 주에 함께 다시 찾아오는 풍경이 드물지 않다.
31년을 버텨온 이유
스톰 브루잉은 스스로를 "오리지널 다이브 브루어리(original dive brewery)"라고 부른다. 트렌드를 따라가는 대신, 오히려 트렌드가 자신들을 따라오도록 내버려 두는 방식으로 31년을 버텨왔다. 밴쿠버 크래프트 맥주의 가장 날 것 그대로인 순간을 경험하고 싶다면, 한 번쯤 로딩 도어를 직접 밀어볼 것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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