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기에 플랑드르 지방 Anzegem이라는 동네가 있다.
겐트에서 남서쪽으로 30킬로쯤 내려가면 나오는 작은 곳. 거기서 세 명이 브루어리를 차렸다. 이름을 't Verzet'라고 붙였는데, 플랑드르 속어로 "저항(the resistance)"이라는 뜻이다.
뭘 저항하는 건지는 나중에 분명해진다.

이들이 Oud Bruin을 만들기 시작한 건 단순한 이유에서였다.
공동창업자 Alex Lippens가 직접 말했다. 우리 아버지 세대, 삼촌 세대가 80년대 90년대 얘기를 해주는데, 그 시절엔 어딜 가도 필스너 탭 옆에 Rodenbach 탭이 나란히 있었다고. 근데 지금은 아무도 안 마신다고.
그게 너무 이상했던 거다.
Oud Bruin은 플랑드르 브라운 에일, 혹은 플랑드르 레드 에일로 불리기도 하는 스타일이다. 벨기에 동플랑드르 지방 Oudenaarde를 중심으로 수백 년간 이어져온 맥주인데, 시고 달고 과일향이 나고 묵직한 그 복합성 때문에 와인에 비유되기도 한다. Rodenbach, Verhaeghe, Liefmanns — 이 동네에선 이미 거인들이 버티고 있다.
Lippens와 Koen Van Lancker는 헨트 대학교에서 양조학을 전공했다. 2008년에 졸업하고 각자 다른 브루어리에서 실무를 쌓은 뒤, 2011년에 't Verzet를 창업한다. 처음엔 De Ranke 브루어리를 빌려서 생산했다.
그들이 저항하는 건 Rodenbach가 아니었다.
"우린 커버밴드가 되고 싶지 않아."
Lippens의 말이다. 영웅에게 영감을 받되, 자기 것을 만든다. 7대째 이어온 가문의 유산 따위는 없다. 우린 1대다. 그러니 더 자유롭다.
재미있는 게, 그들의 첫 배치 이야기다.
Lippens가 Omer Vander Ghinste 브루어리 옆에 살던 시절 얘기다. 200리터짜리 냄비로 워트를 만들어서 11월에 바깥에 내다놨다. 밤새 야생에 노출시킨 거다. 다음날 배럴에 넣었다.
그게 Verzet Oud Bruin의 기원이다.
지금은 훨씬 정교해졌겠지만, 그 감각은 아직 거기 있다. 자연에서 채취한 혼합 배양균(wild-caught mixed culture)을 유지하고 관리하면서 쓴다. Saccharomyces(일반 양조 효모)만이 아니라 Brettanomyces(야생 효모), Lactobacillus(유산균)까지 섞인 복합 미생물 생태계다.
시간과 미생물이 맥주를 만든다.
레시피: 단순하지 않은 것들의 조합
맥아 구성
카라멜 맥아를 대량으로 쓴다. 거기에 미발아 보리(Unmalted Barley)를 약 20% 섞는다.
발아 과정을 거친 맥아(Malted Barley)는 이미 효소를 갖고 있어서 당화가 쉽다. 반면 미발아 보리는 전분 구조가 그대로라 효소가 접근하기 어렵고, 당화 효율도 낮다. 그러니 왜 굳이 쓰냐.
답은 풍미와 질감에 있다. 미발아 보리는 독특한 날 곡물 향(raw grain character)을 주고, 단백질 함량이 높아 맥주 바디에 영향을 준다. 그리고 Beta-glucan 같은 성분이 여과를 복잡하게 만들기도 한다. 쉽지 않은 선택인데 굳이 하는 거다.
카라멜 맥아의 역할도 단순하지 않다. 카라멜 맥아에는 효모가 쉽게 분해하지 못하는 복합당(Complex sugars)이 많다. 주발효가 끝나도 이 당분은 남아 있는다. 그리고 그게 Lactobacillus나 Brettanomyces의 먹이가 된다 — 시간이 지나면서 천천히, 아주 천천히.
결국 맥아 구성 자체가 "지금 당장 맛있는 맥주"가 아니라 "시간이 쌓일수록 깊어지는 맥주"를 위한 설계인 거다.
시리얼 매쉬(Cereal Mash)
미발아 보리를 그냥 본 매쉬에 넣으면 전분이 제대로 풀리지 않는다. 젤라틴화(Gelatinization) 온도가 일반 당화 온도보다 높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리얼 매쉬 기법을 쓴다. 미발아 보리를 별도 솥에서 먼저 끓여 전분을 충분히 젤라틴화시킨 다음 본 매쉬(Main mash)에 합친다. 추가 공정이 들어가는 거다. 시간도 걸리고, 장비도 더 필요하다.
단순히 맥아만 쓰면 이 과정이 필요 없다. 그런데도 한다.
슈퍼 보일(Super Boil): 16시간을 끓인다는 것
일반 맥주는 워트를 60~90분 끓인다. Verzet는 때로 16시간을 끓인다.
처음 시도했을 때 원래 목표가 24시간이었다. 그런데 시작하면서 파티를 벌였고, 16시간 후 아침이 됐을 때 모두가 숙취 상태였다. 그래서 거기서 멈췄다. 지금도 16시간으로 하는 이유가 그거라고 Lippens가 말했다. 실제로 100년 전 Oudenaarde 지방의 Oud Bruin 양조장들은 20~24시간을 끓였다는 기록이 있다. Verzet는 그 전통을 다시 꺼낸 거다.
16시간 동안 뭐가 일어나냐.
마이야르 반응(Maillard Reaction)이다. 당(糖)과 아미노산이 열을 받아 반응하면서 수백 가지 화합물을 만들어낸다. 최종 산물인 멜라노이딘(Melanoidins)은 짙은 갈색을 내는 질소계 고분자다. 여기서 토피, 견과류, 빵 껍질 같은 향미가 나온다. 건포도, 자두, 무화과 같은 어두운 과일(dark fruit) 풍미도 이 과정에서 형성된다.
그리고 증발이 일어난다. 50%가 날아간다. 워트가 농축된다. 나중에 물을 다시 더한다 — 고중력 맥주를 원하는 게 아니라, 카라멜화 풍미만 원하기 때문이다.
결과물은 일반 버전보다 현저히 어둡고, 더 묵직하고, 포도주 같은 복합성을 가진다.
홉을 줄인다는 것의 의미
플랑드르 스타일 산미 맥주에서 홉은 적다. 그냥 스타일의 특성이려니 할 수 있는데, 실제로는 정교한 이유가 있다.
홉의 이소알파산(Iso-α-acids)은 이온운반체(ionophore) 역할을 한다. 세포막을 투과해 세포 내 pH를 떨어뜨리고, 양성자 추진력(proton motive force)을 차단해 세포의 영양소 흡수를 막는다. 결국 Lactobacillus 같은 그람 양성균(Gram-positive bacteria)의 대사를 멈춰버린다.
이게 일반 맥주에선 잡균 방지 기능이다. 사워 맥주에선 방해물이다.
그래서 홉을 극도로 줄인다. Lactobacillus가 일할 수 있도록.
그리고 접종 시점이 중요하다. Verzet는 기본 발효가 끝난 워트에 유산균을 접종한다. 당(糖)이 가득한 상태에서 접종하면 산도가 급격히 올라 날카로운 식초 맛이 나기 쉽다. 발효가 끝난 뒤, 즉 알코올이 이미 생성된 상태에서 접종하면, 남아 있는 복합당을 유산균이 아주 천천히 갉아먹는다. 산미가 부드럽고 둥글게(mellow) 발달한다.
느린 게 목적이다.
과일을 넣지 않고 과일 맛을 낸다는 것
이게 어떻게 가능한가.
핵심은 에스테르(Esters)다. 에스테르는 산과 알코올이 반응해 만들어지는 화합물로, 우리가 과일이라고 인식하는 아로마 분자들이 대부분 여기 속한다.
Brettanomyces가 주요 발효 효모로 작동할 때, 에틸 카프로에이트(Ethyl caproate)와 에틸 카프릴레이트(Ethyl caprylate)가 검출 가능한 수준으로 생성된다. 각각 파인애플 향, 살구·열대과일 향이다. 과일을 한 알도 안 넣고 파인애플 향이 난다.
거기에 마이야르 반응 산물들이 숙성 중에 산(acid)과 반응하면서 건포도, 무화과, 체리 같은 '어두운 과일(dark fruit)' 풍미가 화합물 형태로 고착된다.
배럴도 기여한다. 나무의 미세한 틈으로 들어오는 산소가 맥주를 서서히 산화시킨다. 이 산화가 셰리 와인이나 귀부 와인에서 느껴지는 복합적인 과일 향을 만든다.
그런데 이 모든 게 pH에 민감하다. 유산이 너무 높아지면 오히려 에틸 카프릴레이트(파인애플·코냑 향), 에틸 카프로에이트(사과·아니스 향) 같은 에스테르 생성이 줄어든다는 연구가 있다. 그래서 빠르게 산도를 올리는 게 아니라 천천히, 균형 잡힌 상태에서 유산균이 활동하게 하는 거다.
완전히 발효된 워트에 접종하는 것도, 홉을 줄이는 것도, 결국은 이 균형을 위한 선택이다.
블렌딩: 과학보다 예술에 가까운 과정
7개의 서로 다른 배럴 숙성 베이스 맥주를 블렌딩한다.
각 배럴은 성격이 다르다. 어떤 건 산미가 강하고, 어떤 건 마이야르 반응 산물로 인한 자두 향이 강하고, 어떤 건 Brettanomyces의 가죽·마구간 향(barnyard)이 지배적이다.
이걸 비율을 찾아 섞는다.
기준은 두 가지다.
첫 번째는 총산도(Titratable Acidity, TA)다. pH만 보지 않는다. pH는 산의 강도(날카로움)를 나타내고, TA는 산의 총량(지속성과 무게감)을 나타낸다. 같은 pH여도 강산 조금 있는 것과 약산 많이 있는 건 혀가 느끼는 감각이 다르다. 둘을 함께 관리한다.
두 번째는 잔당(Residual Sugar)이다. 산도가 높더라도 맥아에서 온 비발효성 당분이 충분히 남아 있으면 신맛이 공격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블렌딩 직전 각 배럴의 잔당 수치와 산도를 대조한다.
목표는 수치가 아니다. 침이 고이게 하면서도 목 넘김은 부드러운 상태. 그 지점을 찾는 거다.
미국 Hazy IPA에서 배운다는 것
Lippens가 에피소드에서 한 말 중 가장 흥미로운 부분이다.
미국에서 혁신적인 Hazy IPA가 나왔다. 벨기에 전통 양조사가 보면 무시할 법도 하다. 근데 Lippens는 다르게 생각했다. 저 맥주에서 배울 게 있지 않을까. 저 신선함과 자극, 저 드링커빌리티(drinkability)를 플랑드르 전통 방식에 어떻게 접목할 수 있을까.
거꾸로 생각하면, 이게 진짜 전통의 태도다.
100년 전 Oudenaarde의 양조사들도 그 시대의 새로운 것들을 흡수하면서 자기 스타일을 만들었을 거다. 전통은 박제된 박물관 유물이 아니다. 살아 있는 것들은 계속 변한다.
Rodenbach를 사랑하지만, Rodenbach가 되지 않겠다는 선언. 커버밴드가 아니라 자기 음악을 하겠다는 것.
그게 't Verzet'라는 이름의 의미다.
위스키나 와인을 공부하다 보면 자꾸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가장 좋은 것들은 시간을 재료로 쓴다. 단순히 오래됐다는 게 아니라, 시간 속에서 일어나는 반응들을 — 마이야르 반응이든, 산화든, 유산균의 느린 대사든 — 의도적으로 설계하고 기다리는 거다.
16시간을 끓이고, 7개 배럴을 숙성시키고, 그걸 블렌딩하는 사람들.
그 맥주를 한 모금 마시면, 그 모든 시간이 혀 위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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