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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이야기 <4> - 전주성과 동학농민전쟁

비회원 2005. 9. 12. 14:47
한참을 쉬다 보면 일하는 것이 낯설어 집니다. 한참을 일하다 보면 쉬는 일이 그저 낭비 같을 때가 있습니다.

재영 형!

오늘 문득 형이 제게 주었던 책을 다시 펴보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무예 그렇게 할 말이 많은 지 모르겠습니다. 좋은 책이건 그렇지 않은 책이건 가득차 있는 활자들 그리고 말들.
그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그래도 넉넉히 짐작하고 깨달을 수 있는 그런 얘기, 그런 사람들, 그런 곳곳들....

오늘은 그래서 무척이나 형이 그리워 졌나 봅니다.

새해 첫 달.
프랑스 공화력으로는 '방데미에르(포도의 달)'라고 한다죠?
언젠가 형과 나눈 대화에서 알게 되었고 고종석의 책에서도 확인했지만 공화력의 달 이름은 언제 들어도 형이 늘 잘 쓰시는 '정말 낭만적'입니다.

올 해는 눈이 많이 왔으니 공화력으로 한다면 '니보즈(눈의 달)'이라 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형과 동학에 대해 대화를 나눈다면 형은 예의 그 진지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일 것 같습니다. 1894년에 일어난 농민전쟁과 공학을 결부시켜 '동학농민전쟁', '동학농민혁명'등으로 부르는 걸 보면 그만큼 농민전쟁과 동학과의 깊은 연관을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농민 - 동학 - 전주 로 이어지는 연상.... 물론 동학이라면 고부, 김제 등이 더 적격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아직 전주에는 농촌 도시다운 면모가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매 해 마다 겪는 농민 시위를 보며 동학농민전쟁의 이미지를 떠올리는 제가 너무 불순한 지 모르겠지만 여하튼 이 도시 전주에는 왠지 모를 그런 느낌들이 곳곳에 배어 있는 것 같습니다.

"호남의 비도들은 그때까지도 곳곳에 둔취하고 있었으나 가는 곳마다 추호도 범하지 않고 원소(寃訴)하는 백성들이 있으면 그 자리에서 판결해서 도리어 민심을 얻고 있는 실정인데 우리 관군은 청나라 군사와 더불어 전주영에 머물고 있으면서 이를 구경할 뿐이었다."

동학 혁명 당시 국정 개혁을 담당하는 군국기무처의 책임을 맡고 있었던 김윤식이 자신의 저서 '속음청사(續陰晴史)'에 밝힌 증언대로라면 당시의 농민군이 화력에선 열세였겠지만 도덕적인 면에서는 우월했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도덕성은 윤흥길 씨 말마따나 '자신들이 시방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요지부동의 확신과 그것이 나 개인이 아닌 남들 전체를 위한 일이라는 하늘을 찌를듯한 긍지가 없고서는 사실상 불가능한 ' 일이겠지요.


동학 혁명의 지도자 전봉준 장군을 왜 녹두장군이라고 했는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안도현 시인의 '서울로 가는 전봉준'에서 말해주는 전봉준 장군의 눈빛은 동학 혁명의 이미지와 너무도 잘 맞는다고 봅니다.

琫準이 이 사람아
그대 갈 때 누군가 찍은 한 장 사진 속에서
기억하라고 타는 눈빛으로 건네던 말
오늘 나는 알겠네

어떻든 호남 최대 관문이자 호남의 심장부인 전주성을 동학군이 점령했다는 것은 조선 정부로서는 치명적인 타격인 반면 농민군으로서는 빛나는 승리 - 동학 농민 전쟁 중 최대의 승전 - 였으며 그후의 집강소 설치, 폐정개혁안의 실시 등의 큰 성과를 약속해 주는 확실한 전과였습니다.

전주성을 점령한 전봉준은 지금의 전라북도청이 있는 선화당에 지휘본부를 정하고 경군(京軍- 원래 장위영의 병사로 조선 최고의 정예군과 증원된 병사들은 강화도 수비병인 총제영 병사들로 구성됨, 이들은 독일제 쿠르프식 야포, 회전식 기관총, 모제르식 소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의 공격에 대비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아쉬워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전주를 내려다보는 실제로 경군의 대포로 전주성내를 사격 가능한 곳이 바로 완산 칠봉입니다. 그런데 전봉준은 태조의 어진이 있는 경기전을 향해 감히 대포를 발사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완산칠봉을 수비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전주화약을 맺을 수밖에 없었지 않았느냐는 것이겠지요. 경군만 깨뜨렸다면 서울까지 진격했을텐데.... 라는 아쉬움 말입니다.

그러나 경군도 완신칠봉에 야포를 설치하고 경기전을 바라보며 대포질을 하는 게 쉽지만은 않았을 것 같습니다. 또한 그러한 결정이 일개 초토사 홍계훈의 독단적인 결정은 아니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고종이 대포로 인한 전주성의 파괴 소식을 접하면서도 탄식만 할 뿐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이 때 파괴된 전주성내 곳곳의 피해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의 피해보다 컸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임진왜란 때는 전주성이 함락되지 않았고 또 어진과 실록등을 유생들이 내장산까지 지게로 져 날라서 보호했고 정유재란 때는 남원성이 점령되었다는 소기을 듣자 조선군과 명군이 전주성을 버리고 그대로 도망쳐 전투 한 번 벌이지 않고 전주성을 내주는 바람에 성과 성내의 파괴는 거의 없었다고 하니까요

그리고 농민군이 오히려 조정에 서찰을 보내 이렇게 경기전을 파괴해도 되는 것이냐고 꾸짖는 것을 보면 조정이 농민군에 대해 얼마나 다급하게 생각했었는 지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서문 밖과 남문 밖을 보면 농민군의 흔적은 없습니다. 우금치 전투를 끝으로 농민군에 대한 철저한 색출 작업으로 수많은 농민군들의 목을 친 전주천변 초록바위에는 오히려 천주교 순교자가 죽었다는 비석이 있을 뿐입니다.(오히려라는 표현을 쓴 것은 동학의 처지에서 봤을 때 서학인 천주교의 성지가 된 것을 두고 한 말입니다.)

재영 형

제가 너무 어두운 얘길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농민군의 자취가 흔적도 없는 서문과 남문에서 노동에 대해서, 국가에 대해서, 혁명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본 것도 너무 부질없을 것 같진 않군요.

어떻든 새해 덕담을 아직 건네지 못했군요.
새해엔 더욱더 인자해지시고 너그러워 지시길 그리고 나이가 들어갈수록 오히려 싱그러워 지시길....

방데미에르 4일에
의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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