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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하는 맥주, 혹은 시간을 마시는 방법에 대하여

벨기에 플랑드르 지방 Anzegem이라는 동네가 있다.겐트에서 남서쪽으로 30킬로쯤 내려가면 나오는 작은 곳. 거기서 세 명이 브루어리를 차렸다. 이름을 't Verzet'라고 붙였는데, 플랑드르 속어로 "저항(the resistance)"이라는 뜻이다.뭘 저항하는 건지는 나중에 분명해진다.이들이 Oud Bruin을 만들기 시작한 건 단순한 이유에서였다.공동창업자 Alex Lippens가 직접 말했다. 우리 아버지 세대, 삼촌 세대가 80년대 90년대 얘기를 해주는데, 그 시절엔 어딜 가도 필스너 탭 옆에 Rodenbach 탭이 나란히 있었다고. 근데 지금은 아무도 안 마신다고.그게 너무 이상했던 거다.Oud Bruin은 플랑드르 브라운 에일, 혹은 플랑드르 레드 에일로 불리기도 하는 스타일이다. 벨기에..

무의식은 어떻게 나를 설계하는가 - 독후감

책 제목이 좀 거창하다."무의식은 어떻게 나를 설계하는가."설계라니. 마치 내가 누군가의 프로젝트인 것 같아서. 처음엔 그냥 지나쳤다.그런데 읽다 보니, 진짜로 그런 것 같아서 좀 씁쓸해졌다. 데이비드 이글먼은 신경과학자다.뇌를 들여다보는 사람.그가 하는 말은 간단하다.당신이 "내가 결정했다"고 믿는 그 순간, 사실 뇌는 이미 수백 밀리초 전에 결정을 끝냈다는 것.의식은 그냥 사후에 이야기를 꾸며내는 나레이터에 불과하다고. 솔직히 좀 불편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맞는 것 같기도 하다.증류를 하다 보면 그런 순간이 있다.증류기 앞에 서서 헤드, 하트, 테일을 자르는 순간.수치를 보는 게 아니다. 향을 맡고, 입에 대보고, 그냥 안다."여기다."분석이 아니다. 뭔가가 먼저 반응한 거다.나중에 생각해보면 맞..

아무거나 2026.04.29

이스트 밴쿠버의 살아있는 전설 — 스톰 브루잉(Storm Brewing) 이야기

이스트 밴쿠버는 노숙자 문제로 거칠다는 인상이 강한 동네지만, 낮은 임대료 덕분에 개성 강한 가게들이 하나둘 모여드는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1994년부터 단 한 번도 자리를 옮기지 않은 양조장이 묵묵히 버티고 있다. 310 Commercial Drive에 위치한 스톰 브루잉이다.James Walton, 밴쿠버 크래프트 맥주의 선구자스톰 브루잉의 창업자이자 헤드 브루어인 James Walton은 UBC에서 식물학과 생화학을 공부했다. 재학 시절부터 직접 맥주를 빚어 친구들과 나눠 마시던 그는, 졸업 무렵 확신을 얻었다. "내가 아는 지식을 여기에 써먹어야겠다"고. 1994년, 그는 뉴웨스트민스터 고물상을 직접 돌아다니며 낡은 탱크와 장비를 모아 양조장을 차렸다. 매쉬 턴은 폐요거트 제조기를..